아이가 가지게 된 장애에 대하여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특수교육 작성일18-05-25 07:17 조회2,781회 댓글0건본문
중특 18 김유정
나는 문명 이전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람들이 ‘장애’에 대하여 바라보는 인식에서 ‘신체적 기형을 가진 아이의 출생은 신들을 불쾌하게 만든 부모의 잘못’ 이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깊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내 동생이 어릴 적 저혈당증으로 인한 쇼크로 인하여 전신 발작을 일으켰을 때
엄마가 무척이나 당황을 하여 119에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닌 동생을 안은 상태로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이동을 하며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일요일이라 주치의 선생님이 아닌 레지던트 분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지 못하여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정확한 진단과 그에 맞는 처방을 하시는 데까지의 긴 시간동안 동생의 뇌까지 산소가 전달되지 못하여 그 과정에서 뇌세포가 많이 손상되어 지적장애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하여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죄책감을 항상 가지며 살아가던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동생이 태어나고 아프면서 건강한 나보다 더 아픈 손가락인 동생에게 모든 가족 구성원의 관심이 돌아가며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외할머니와 이모 댁을 번갈아가며 지냈던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그때의 나는 왜 부모님과 함께 있지 못하며 주기적으로 혼자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동생에게 신경을 쓰시느라 나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이 힘든 부분에 대해서도 그 당시에는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동생에게 집중된다고 생각하여 질투하며 시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던 상황과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동생이 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그동안 엄마가 느꼈던 감정들을 내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며 그동안의 나의 어린(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엄마는 본인이 그 상황 속에서 남들과는 다르다고 느껴 두려운 마음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장애라는 판정을 받은 후 1시간동안 화장실에서 운 후 부운 얼굴로 KTX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오는 길에 좌절을 했지만 불안해하며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엄마,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는 나의 얼굴을 보며 ‘아직 내 옆에는 큰 딸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내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싫었을 뿐더러 더더욱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은 싫었고,
그당시 주치의셨던 신의진 선생님의 ‘조금이나마 더 빨리 특수교육을 받는다면 동생이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으며 ’그래.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자. 나중에 내가 내 스스로에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자. 그래서 민이가 많이 좋아진다면 정말 좋은 일이고, 설령 그렇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적어도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후에 후회는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다시 힘을 내서 시작하자‘ 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며
다행히도 현재 그때에 비하면 인지, 발달 면에서 많이 좋아졌고 딸인 나도 잘 커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엄마에 비해 느끼는 감정에 대한 표현이 적었기에 어릴 때의 나는 아빠는 덤덤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때의 아빠도 엄마가 느꼈던 감정의 크기와 비교하였을 때 더 적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던 것 뿐이며 흔들리는 가정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가장으로서 감정을 겉으로 표현할 수 없이 속으로 감정을 수그리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전의 나는 나도 부모님의 관심이 필요한데 모든 관심이 동생에게로 집중되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누군가 나에게 부모님도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것은 처음이고, 나 역시 누군가의 자녀가 되는 것은 처음이기에 서툴 수 밖에 없고, 동생은 부모님의 열 손가락 중 더 아픈 손가락이므로 더 관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는 말에 이때까지 동생을 질투하였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너무 늦게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세월이 더 지나 내가 부모님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현재 부모님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모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누구와도 비 교할 수 없을만큼 우리를 모두 아끼시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만약 내가 더 성장하여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그 아이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아이를 양육시키는 과정에서 지금의 우리 부모님처럼 힘든 과정들을 잘 헤쳐나가며 아이를 위해 한 번 밖에 없는 부모님의 삶 아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부분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자녀에게 올인(all-in)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희생하시는 부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며 나와 내 동생이 부모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가능성이 낮거나 없다고 말하였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 지금까지 온 우리 가족처럼
장애를 가지게 된 아이를 둔 가족이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에서 고민이 많이 있을지라도 아이와 본인의 가정의 더 나을 후의 삶을 위해 아이가 더 좋아질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한다면 우리 동생처럼 좋아질 수 있으니 현재의 상황에 갇혀 우울해하며 포기하지 않고, 다른 가정의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장기간의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아이의 발전에 실망하지 않고 시간을 장기적으로 길게 보아 처음과 비교하였을 때 퇴화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발전해나가는 아이의 모습에 감사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명 이전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람들이 ‘장애’에 대하여 바라보는 인식에서 ‘신체적 기형을 가진 아이의 출생은 신들을 불쾌하게 만든 부모의 잘못’ 이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깊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내 동생이 어릴 적 저혈당증으로 인한 쇼크로 인하여 전신 발작을 일으켰을 때
엄마가 무척이나 당황을 하여 119에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닌 동생을 안은 상태로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이동을 하며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일요일이라 주치의 선생님이 아닌 레지던트 분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지 못하여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정확한 진단과 그에 맞는 처방을 하시는 데까지의 긴 시간동안 동생의 뇌까지 산소가 전달되지 못하여 그 과정에서 뇌세포가 많이 손상되어 지적장애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하여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죄책감을 항상 가지며 살아가던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동생이 태어나고 아프면서 건강한 나보다 더 아픈 손가락인 동생에게 모든 가족 구성원의 관심이 돌아가며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외할머니와 이모 댁을 번갈아가며 지냈던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그때의 나는 왜 부모님과 함께 있지 못하며 주기적으로 혼자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동생에게 신경을 쓰시느라 나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이 힘든 부분에 대해서도 그 당시에는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동생에게 집중된다고 생각하여 질투하며 시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던 상황과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동생이 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그동안 엄마가 느꼈던 감정들을 내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며 그동안의 나의 어린(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엄마는 본인이 그 상황 속에서 남들과는 다르다고 느껴 두려운 마음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장애라는 판정을 받은 후 1시간동안 화장실에서 운 후 부운 얼굴로 KTX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오는 길에 좌절을 했지만 불안해하며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엄마,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는 나의 얼굴을 보며 ‘아직 내 옆에는 큰 딸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내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싫었을 뿐더러 더더욱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은 싫었고,
그당시 주치의셨던 신의진 선생님의 ‘조금이나마 더 빨리 특수교육을 받는다면 동생이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으며 ’그래.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자. 나중에 내가 내 스스로에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자. 그래서 민이가 많이 좋아진다면 정말 좋은 일이고, 설령 그렇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적어도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후에 후회는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다시 힘을 내서 시작하자‘ 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며
다행히도 현재 그때에 비하면 인지, 발달 면에서 많이 좋아졌고 딸인 나도 잘 커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엄마에 비해 느끼는 감정에 대한 표현이 적었기에 어릴 때의 나는 아빠는 덤덤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때의 아빠도 엄마가 느꼈던 감정의 크기와 비교하였을 때 더 적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던 것 뿐이며 흔들리는 가정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가장으로서 감정을 겉으로 표현할 수 없이 속으로 감정을 수그리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전의 나는 나도 부모님의 관심이 필요한데 모든 관심이 동생에게로 집중되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누군가 나에게 부모님도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것은 처음이고, 나 역시 누군가의 자녀가 되는 것은 처음이기에 서툴 수 밖에 없고, 동생은 부모님의 열 손가락 중 더 아픈 손가락이므로 더 관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는 말에 이때까지 동생을 질투하였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너무 늦게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세월이 더 지나 내가 부모님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현재 부모님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모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누구와도 비 교할 수 없을만큼 우리를 모두 아끼시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만약 내가 더 성장하여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그 아이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아이를 양육시키는 과정에서 지금의 우리 부모님처럼 힘든 과정들을 잘 헤쳐나가며 아이를 위해 한 번 밖에 없는 부모님의 삶 아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부분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자녀에게 올인(all-in)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희생하시는 부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며 나와 내 동생이 부모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가능성이 낮거나 없다고 말하였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 지금까지 온 우리 가족처럼
장애를 가지게 된 아이를 둔 가족이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에서 고민이 많이 있을지라도 아이와 본인의 가정의 더 나을 후의 삶을 위해 아이가 더 좋아질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한다면 우리 동생처럼 좋아질 수 있으니 현재의 상황에 갇혀 우울해하며 포기하지 않고, 다른 가정의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장기간의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아이의 발전에 실망하지 않고 시간을 장기적으로 길게 보아 처음과 비교하였을 때 퇴화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발전해나가는 아이의 모습에 감사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