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사랑의 노래 > > 장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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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이야기

< 가난한 사랑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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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부관리자 작성일19-11-21 07:32 조회2,1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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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김영선 씨의 삶 - ①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시는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인데 줄 바꿈은 필자가 임의로 했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가난을 겪을 때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그리움과 사랑 등의 정신적 감정이 심화되거나 제한받게 되어 있다.

두 점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 등은 가난하고 소박한 삶의 공간을 환기시키는 쓸쓸한 소리이자 비정한 도시의 상징 같은 소리지만, 그러나 이미 사라진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이러한 인간적 감정마저도 외면하고 살아야 하는가. 시인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삶에 대한 깊은 연대의식과 이 시를 통해 유대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김영선 씨의 삶에서 가난이란 그저 일상일 뿐이고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이자 삶의 무게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 무게를 묵묵히 견디면서 딸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딸은 철이 들면서부터 부모님의 그 가난의 무게를 덜어주고 싶어 했다.

김영선(1974년생) 씨는 기장군 철마에서 태어났다. 현재 기장군은 부산시 소속이지만 1995년 이전에는 경상남도였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할머니와 삼촌과 고모가 같이 살았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백내장으로 앞을 잘 보지 못했다. 부모님은 절망했으나 아이의 눈을 고쳐 보려고 좋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 다녔고 침을 맞고 탕약을 달였다.

“울산에 가면 만지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면 낫는다고 해서 울산에도 갔다고 합디다.”

부모님은 별의 별짓(?)을 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낫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아버지는 깨신 분이었습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아이가 백내장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어 했을 텐데, 아버지께서는 “눈이 나쁜 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친척들이나 가족모임에 그를 데리고 다녔다.

최근 들어 통합교육의 확대와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장애아동이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환경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30년 전 시절에는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은 이웃 사이에서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사회였다. 그래서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방에 홀로 남겨두는 것은 물론, 명절 등 주요 대소사 때 친인척이 찾아오면 장애 아이는 다락방에 숨기는 등 친인척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김영선 씨의 백내장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

“병원에서도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부모님은 시력이 정상인데 먼 친척 중에 약시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친척을 어렸을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할아버지에게서 유전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어머니를 탓했다.

“할머니께서 저는 예뻐하셨는데, 그러나 어머니를 엄청 구박했나 봅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눈 나쁜 애를 낳은 것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새어머니셨는데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그야말로 팥쥐 엄마였다.

“고모도 철이 없었는지 어머니가 도시락을 사 주면 반찬이 맘에 안 든다고 도시락을 마당에다 패대기치곤 했답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워 눈물의 세월을 살았다.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쌀 한 자루를 메고 어머니와 저를 데리고 두구동으로 분가를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두구동으로 이사를 해서 두 분 다 근처 한천 공장에서 일을 했다. 두구동은 부산시 금정구지만 당시만 해도 시골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철모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지만 나이가 들자 아이들이 ‘봉사봉사’하면서 놀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그중의 한 아이를 잡아서 다시는 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찾아오지는 않았을까.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후부터 저를 놀리는 아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학령기가 되어 근처 일반학교에 입학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선생도 그를 제일 앞자리에 앉게 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버지 어머니 철수야 영이야 같은 한글을 배웠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교에는 부산맹학교에 근무하다가 온 선생이 있었다. 그 선생은 담임도 아니었는데 어찌하다 그를 알게 되어 담임과 함께 먼저 부모님을 만났다. 선생은 그를 맹학교로 보내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맹학교 등 특수학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교사가 드물었다. 이에 김영선 씨의 경우 좋은 교사를 만나 진학지도와 상담에 도움을 받은 모양이다.

“2학년이 되기 전 겨울에 부모님과 함께 송도(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맹학교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부산맹학교에서는 “눈이 언제부터 그랬느냐?”는 등 그와 부모님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맹학교에서는 김영선 씨의 입학을 허가했다.

부산맹학교는 6·25 동란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 온 국립 서울맹아학교가 1953년 서울로 돌아가면서, 부산에 잔류하고 있던 학생들과 서울로 갈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서울맹아학교 부산분교가 되었다가 1955년 부산맹아학교로 독립했다.

맹아(盲啞)학교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함께 공부했던 학교인데 1974년 맹·농(盲聾)이 분리되어 농아학교가 이사를 가서 부산맹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1997년 부산맹학교는 현재 위치한 동래구 명장동으로 이사를 했다.

김영선 씨가 입학했던 부산맹학교는 이미 맹·농이 분리된 이후였다.

“수업료는 무료였지만 집 괜찮게 사는 아이들은 육성회비를 내고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라이트하우스에서 살았습니다.”

현재 특수학교는 학비는 전액 무료이고 기숙사비도 무료다. 당시만 해도 부산맹학교는 특수학교라서 학비는 무료지만 육성회비는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기숙사와 라이트하우스가 다른 점은, 기숙사는 육성회비를 내는 것 외에 방학과 명절이면 문을 닫았다. 공립 맹학교 기숙사에는 아무도 머무를 수 없었다. 언젠가 필자가 만난 시각장애인이 맹학교 기숙사에 살았는데 방학이 되어도 돌아갈 곳은 없고 기숙사에는 불도 없고 밥도 없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건빵을 불려 먹었다고 했다. 다행히 그 학교는 사립 맹학교였다.

라이트하우스는 1951년 서구 암남동에 설립된 시각장애인 사회복지시설이다. 부산맹학교와 1km쯤 떨어져 있었기에 기숙사에 살지 않는 맹학교 학생들은 라이트하우스에서 생활했다. 라이트하우스는 부모가 없는 고아나 저소득 아이들이 맹학교 기숙사 겸 생활을 했는데 1997년 맹학교가 명장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라이트하우스는 시각장애인 보호에서 지적장애인을 추가했다.

김영선 씨가 살았던 라이트하우스 그리고 송도 바닷가에는 유년의 추억이 출렁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라이트하우스에 살았는데, 어렸을 때는 학교와 라이트하우스밖에 몰랐으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시간이 날 때면 송도 바닷가에서 살았다.

“라이트하우스에 오는 자원봉사자들은 부산진여상 진명회, 선화여상, 부산상고 송광회, 동의대학교 조은회 등의 봉사동아리 언니 오빠들이 자주 왔는데 언니 오빠들이 오면 바닷가에 가서 조개도 줍고 모래집도 지으면서 놀았습니다.”

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일반 사회 학생들의 생활과 문화를 같이 경험하고 공유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세상이 변해서 요즘 이러한 순수성과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봉사활동 동아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다. 최근 들어 봉사활동은 순수성 보다는 거처가야 하는 스펙 쌓기 과정이 많아 오히려 자원봉사 정신이 폄하내지 퇴색되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말마다 집에 가지 않았기에, 송도 바닷가에서 구름다리도 타고 멀리 혈청소까지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혈청소는 학교에서 소풍을 가던 곳이기도 한데, 어떤 때는 대신동 꽃마을에도 소풍을 갔습니다.”

학교 점심시간은 자연스레 운동하는 시간이었다. 기숙사생들은 기숙사 식당에 가서 먹었으므로 여유 시간이 많았으나, 라이터하우스에 살던 학생들은 그곳까지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올라와야 하므로 점심시간이 빠듯하기도 했다. 특히, 비오는 날이면 전맹 시각장애인들과 짝을 지어 가다보니 옷이 젖는 경우도 많았다.

“소풍 때는 주로 김밥을 싸서 갔습니다. 그래서 기숙사생, 통학생들과 같이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비오는 날은 강당에 모여 노래자랑 등 나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두 번 했으니까 그래도 9살인데, 부모님을 떠나서 라이트하우스에서 생활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침이면 밥 먹고 학교에 가야하고 규칙적인 학교생활에서는 엄마 아빠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출처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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