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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이야기

< 유년의 추억이 출렁거리는 그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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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부관리자 작성일19-11-25 07:01 조회2,0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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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김영선 씨의 삶 - ②

“밤이 되면 미치도록 집이 그립고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남몰래 운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홉 살짜리 어린애가 뭘 알겠는가마는 그러나 그는 참고 견뎌야 했다. 요즘 같이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빨리 빨리 시간이 지나가서 토요일 오후가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시각장애인 학생들의 경우 대부분 단체생활을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개별화 되고 부모들의 인식이 개선되어 통학생이 늘어났지만 예전에는 단체생활을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생활을 배우고, 후배들에게 자연스레 대물림하여 전하는 문화가 있었다. 즉, 최근 장애인 계의 화두인 자립생활은 그 당시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맹학교 출신 시각장애인들의 단합심과 단결심이 타 장애유형에 비해 강한 시기도 있었다.

“토요일이면 엄마가 데리러 왔습니다. 엄마와 같이 버스를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집에 갔고, 월요일 아침이면 엄마는 다시 학교로 데려다주었습니다.”

세상에 월요일이 없었으면 싶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월요일이 없으면 부모님과 떨어져서 학교에 안 가도 되니까. 그러나 일요일이 지나면 월요일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라이트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맹학교 1학년 때 점자를 배웠습니다. 일반학교에서 한글(묵자)을 배웠는데 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우면서 한글은 다 까먹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안 하면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일반학교 1학년 동안 한글을 배웠는데 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우면서 한글은 다 잊어버렸단다.

“아버지께서 제가 한글을 다 잊어버렸다는 것을 아시고, 마을(두구동)에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서당 같은 것을 하고 계셨는데 방학 때는 그곳을 다니게 했습니다.”

서당 같은 곳이었지만, 할아버지가 한문은 아니고 국어와 산수 그리고 역사 같은 것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래서 다행인지 그는 묵자도 알고 점자도 안다. 나중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가정통신문을 큰 글씨로 써 오면 읽을 수도 있었단다.

지난 7월 1일부터 장애등급이 폐지되어 장애는 중증과 경증으로 구분되었다. 장애등급이 폐지되기 전의 시각장애인은 1급부터 6급까지인데, 6급은 한쪽 눈의 실명이고 그 외 5급부터 1급까지는 시력의 저하다. 시각장애 1급에는 빛도 구별하지 못하는 전맹이 있는 반면 확대경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각장애인은 컴퓨터로 뽑은 인쇄물을 50~60pt로 확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라이트하우스에서는 아침이면 밥을 먹고 앞을 좀 보는 약시생이 앞장서고 그 뒤를 전맹 학생들이 손을 잡거나 뒤를 따라서 학교로 갔습니다.”

그는 약간은 보이는 상태(저시력)라 전혀 안 보이는 아이들의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 주는 등 보모(보육교사) 대신해서 전맹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 주기도 했다.


“1학년 처음 들어갔을 때 하루는 콩나물국이 나왔는데, 선배들이 반찬이 부실하다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밥 안 먹는다고 전부다 식당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선배들이 하는 일이라 끽소리도 못하고 모두 다 아침을 쫄쫄 굶고 학교로 갔다.

“당시 전정애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는 우유와 호빵을 사 와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날의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었다. 현재(인터뷰 당시) 김영선 씨는 센텀**에서 안마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정애 선생님이 안마를 받으러 왔더란다.

“전정애 선생님이 얼마나 고맙고 반갑든지, 그래서 지금은 가끔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만 해도 배고픈 시절이라, 라이트하우스에서는 밤이면 항상 배가 고팠다.

“라이트하우스에는 식자재 같은 것을 쌓아두는 창고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지나 옥수수 같은 것을 몰래 훔쳐 먹었습니다.”

껌껌한 곳이고 더구나 시각장애인들이다 보니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 중에서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는 것 들 중에서 생각나는 것이 가지와 외 옥수수 등이라고 했다.

“가끔 선배들이 커다란 바케츠에 더운물을 가져와서 라면을 끓이는 게 아니라 불려 먹기도 했습니다.”

라이트하우스에서는 카레가 자주 나왔다. 카레를 밥에 얹어주면 먹기가 수월한 모양이었다.

“카레가 나오면 며칠씩 냄새가 배어 있기도 했고, 그때는 카레가 정말 싫었는데 요즘은 집에서도 가끔 해 먹습니다.”

학교에서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었을까.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없었지만 육상을 좋아했고 특히 달리기를 잘했습니다.”

시각장애인 봉사자 없이 달리기를?

“지금도 도우미 없이 혼자 길을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달리기하는 것 외에 그가 잘하는 것은 없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점심시간마다 장구를 쳤습니다.”

음악선생이 국악 선생이라 장구 칠 사람은 오라고 했다. 점심시간이면 일찍 점심을 먹고 음악실로 가서 장구를 쳤다. 주로 영남농악을 했는데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음악선생이 안 오시면 음악실은 문이 잠겨 있어서, 점심시간이 정말 길고 지루했습니다.”

집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갔을까.

“초등학교 때는 토요일마다 어머니가 오셨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혼자 다녔습니다.”

혼자서 송도에서 두구동 집까지?

“그건 아니고, 라이트하우스에는 주말이면 자원봉사활동을 하러 오는 부산상고 오빠하고 같이 갔습니다.”

부산상고 학생 중에 팔송에 사는 학생이 있어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그 오빠가 혼자 다닐 수 있어야 된다면서 집에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더 이상 어머니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되었고, 그리고 매주 집에 가지도 않았다.

“그래도 저는 집이 있어서 일주일 한 번씩 집에 갈 수 있었지만, 라이트하우스에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세상에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눈을 감아서 버린 것인지 라이트하우스에는 고아들이 많았단다.

“라이트하우스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도 보내주지만, 학교에서 주는 우윳값은 내야 했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우윳값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고아들은 우윳값을 내지 못해 우유를 못 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제가 처음 직장을 다니면서 몇 년 동안 어떤 아이의 우윳값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고학년이 되면서 아침마다 여자 아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겨서 학교로 데리고 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안마와 침술을 배우는데, 고3 시절에는 오전에는 선생님에게 배우고 오후에는 밖에 계시는 분들에게 안마를 해 주었습니다.”

학교 부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오후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찾아왔는데, 그분들에게 실습으로 무료로 안마를 해주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침술과 안마를 배우기는 하지만, 나중에 커서 무엇을 하겠다는 희망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안마사가 되고 간혹 대학을 가는 학생은 교사나 사회복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당시에 부모님은 한천 공장을 그만두고 조그만 목장을 하셨는데,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아버지 목장 일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이 두구동으로 이사를 하고 동생을 낳았다. 여동생은 그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였는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동생도 저시력(약시)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맹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못내 가슴 아팠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저를 멀리 보낸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시면서, 그 대신 동생은 좀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어 하셨습니다.”

11살 여름방학 때 메리놀병원에서 인공수정체 수술을 했다. 동생도 같이 수술을 했는데 그래도 동생은 초등학교까지는 부모님 곁에서 일반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동생도 중학교부터는 맹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다른 지방에서 안마사로 일하는데 결혼도 안 했습니다.”

그는 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안마사로 취업을 했다. 그러나 첫 직장이라 안마사는 처음이었다.

“A 씨가 많이 도와주었는데, 매일 한 시간씩 A 씨에게 안마를 하면서 안마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안마사로 취직을 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버지에게 젖소를 사드리고 그리고 동생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었다.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께 젖소는 아니고 젖소 새끼를 사드리고 동생에게 용돈도 주었습니다.”

안마 기술이 조금씩 늘어나자 안마원을 몇 군데 옮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B 안마원에서 김원석(1970년생) 씨를 만났다.

김원석 씨는 일반학교를 다녔으나 눈이 좋지 않아서 군대는 방위를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눈이 점점 나빠져서 하는 수없이 시각장애인 등록을 하고 안마수련원을 나온 사람이었다.


#출처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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