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서 놓지 말아야 할 것들-지체장애 손필숙 씨의 삶 > > 장애 이야기

menu_tlt_mo_01.jpg

장애 이야기

< 삶에서 놓지 말아야 할 것들-지체장애 손필숙 씨의 삶 >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부관리자 작성일19-10-28 06:04 조회3,071회 댓글0건

본문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 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이 시는 김남조 시인의 ‘생명’이다. 인간에게 있어 생명은 곧 삶이다. 생명의 진실은 벌거벗은 언 땅에서 초록 보리처럼 불에 타고 피를 흘리며 온다고 했다. 생명은 고난과 시련을 거쳐서 탄생한다. 추운 언 땅은 생명이 자라기 어려운 악조건임에도 추운 몸으로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고 했다.

생명의 근원은 대자연이다. 진실도 시련을 통해 깨닫게 된다. 추운 날 제 몸을 다듬는 면도날처럼 인간의 삶은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질은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손필숙(1966년생) 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이다. 예전에는 밀양군이었고 가지산 아래 표충사 부근의 첩첩산중이었다. 그래서 꼬불꼬불 산길을 휘돌아가는 시골 버스는 하루에 한 번 다녔다고 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고 그는 2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첫돌 무렵이라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두 발로 걸어 본 걸어본 기억은 없다고 했다.

첫돌 무렵의 어느 날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놀라서 아이를 없고 한의원을 찾았는데 두서너 군데 있던 한의원이 전부 문을 닫았다고 했다. 시골이라 병원(의원)도 없었고, 한의원인지 한약방인지 두세 군데 있었는데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고 했다. 물론 한의원에 갔다 해도 별수 없었겠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이의 열을 내리고자 애를 썼고, 며칠 후 아이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에 또래 친구들이 찾아 와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일으켜 세우니까 쓰러지고 또 일으켜 세우니까 픽 쓰러지고 결국 못 일어나더랍니다.”

어머니는 열도 다 내렸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어머니가 이번에는 아이를 업고 밀양 읍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소아마비라고 진단했다. 소아마비는 바이러스인데 그 깊은 첩첩산중까지 어떻게 침투했을까.

소아마비는 폴리오(polio) 바이러스에 의한 신경계의 감염으로 발생하며 회백수염(척수성 소아마비)의 형태로 발병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와, 인두나 소장의 림프조직에서 증식하다가 혈관을 매개로 하여 체내에 퍼져나가 척수전핵세포 등의 감염으로 대부분이 하지마비 증상이 나타나는데 간혹 상지마비가 오기도 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소아마비가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전후부터 발병하여 1950년 6.25 무렵부터 전국을 강타하기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 기승을 부린 것 같다. 그러나 1955년 미국의 의사 겸 생물학자인 조나스 소크(1914~1995)가 소아마비 백신 연구에 성공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아마비 예방접종으로 소아마비는 점점 줄어들어 1983년 이후 소아마비 환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약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어머니는 여기저기서 귀동냥으로 들은 민간약으로 개구리도 삶아 먹이고 쥐도 잡아 먹였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물론 그는 기억도 잘 못하지만.

“소아마비는 안 나았지만, 그 대신 어머니가 그런 약들을 해 먹인 덕인지 크면서 잔병치레는 별로 안 한 것 같습니다.”

적령기가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입학할 무렵 목발을 맞춘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는 잘 걷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입학한 것 같은데, 그 후에는 큰오빠가 자전거에 태워주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소아마비가 유행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시골 학교에도 소아마비로 걸음을 잘 못 걷는 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사람들은 동병상련이라고 해서 장애인끼리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싫었다고 했다. 어릴 때는 그런 용어조차 잘 몰랐지만, 학교에서 소아마비 장애인을 만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소아마비 장애인이 저만치서 절룩거리면서 걸어오면 애써 모른 채 다른 길로 피했다. 어린 마음에도 장애인은 자기 하나면 됐지 옆에 또 다른 장애인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어떤 집에서 장애인이라고 숨겨 놓고 키웠다는 소문도 있던데, 우리 집은 그렇지는 않았고 아버지께서 다른 형제들보다 저를 더 예뻐해 주셨습니다. 특히 군인코펠을 우리 밀양에서는 한구(?)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한구에 제 밥만 따로 해주시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집에서 멀지는 않았기에 큰오빠가 자전거 또는 경운기에 태워 주었다. 나이가 들면서 걸어 다니기도 했던 모양이다.

“친구들하고 보리나 밀 서리를 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리란 옛날에 아이들이 떼거리로 장난삼아서 하던 일종의 도둑질이었다. 요즘은 서리를 했다간 도둑으로 몰려 절도죄나 횡령죄가 되지만 예전의 서리는 장난이었다. 서리의 대상은 주로 콩 보리 밀 등의 곡식과 수박 참외 등이 있었고, 가끔은 동네 청년들이 닭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다.

밀이나 보리 서리는 초여름 밀이나 보리가 익기 전의 풋보리를 꺾어다가 불에 그슬려서 알곡을 골라 먹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입술이 시꺼멓게 되어 어른들에게 들키기도 했다.

#출처입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