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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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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부관리자 작성일19-11-27 12:07 조회2,1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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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김영선 씨의 삶 - ③

안마사가 하는 일은 손이나 기구를 이용하여 고객의 근육을 두드리거나 주물러서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육체피로를 경감시키는 일을 한다. 이 같은 안마사는 「의료법」 제82조에 따른 국가공인자격증이다. 안마사의 자격기준은 맹학교 고등부 3년이나 안마수련원 2년 동안 해부생리 병리 이료임상 등 1천여 시간 동안 공부를 해야 된다.

시각장애인이면 누구나 나이 제한 없이 맹학교 고등부나 안마수련원에 입학할 수가 있는데 수련원 입학도 중학교 졸업 이상이어야 된다. 때로는 일반 대학교를 졸업하고 눈이 나빠져서 오는 경우도 있다.

“김원석 씨가 너무 안 돼 보였습니다.”


장애에 임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선천성인 경우 어릴 때부터 장애에 조금씩 길들여지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장애를 인지하고 수긍하게 된다. 그러나 중도 장애 그것도 성인이 된 이후에 입게 되는 장애는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석 씨는 군대(방위)도 갔다 오고 RP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안마)수련원을 나와서 안마를 하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너무 짠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자매였는데, 김원석 씨는 형제만 둘이었다.

“그 사람이 너무 안 돼 보여서 다독이다 보니 결혼해야 되겠다 싶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얘기했더니 “너만 좋다면 결혼 하라"라고 했다. 김원석 씨 집에서도 그를 좋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장애인끼리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에 김영선 씨의 부모님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잘 되어 있는 분들인 것 같았다.

“29살 겨울에 결혼을 했습니다.”

김원석 씨 부모님은 대연동에 살고 있었는데 처음 결혼을 하고는 시댁에서 같이 살았다. - 지금은 분가를 해서 시부모님과 같이 안 산다고 했다.

“아들 하진이를 낳았는데, 시어머니와 같이 키웠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으나 시어머니는 정안인이었다.

“애가 서너 살이 되자 어린이 집엘 보냈는데, 아이가 저의 장애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남편 김원석 씨는 성인이 된 후에 RP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지만 현재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전맹이다. 김영선 씨는 그래도 혼자서 길을 다닐 수는 있지만 그래도 시각장애인이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우리 하진이가, 엄마가 시각장애인이므로 가정통신문에 글씨를 크게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어린이집 선생의 그 말을 듣고는 어찌나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나든지……. 아이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시각장애인임을 인지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했다.

하루는 어린이 집 원생 사진 속에서 아들 하진이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사진을 유심히 보고 또 보았다.

“사진 속 우리 아들 하진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이를 잘 찾지 못하는 엄마, 눈이 보여서 아들을 마음대로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엄마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보이는 눈으로 아들의 특징 찾아서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야! 우리 아들 찾았다.”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선생님도 우리 하진이가, 엄마가 볼 수 있도록 가정통신문 글씨를 크게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지난 7월부터 장애등급이 폐지되기는 했지만, 그 전의 시각장애인 기준은 ‘좋은 눈의 시력이 0.02이하인 사람’은 1급이고, ‘나쁜 눈의 시력이 0.02이하인 사람’은 6급이었다. 그 사이에 확대경으로 보는 저시력도 있고, 밤낮을 구분 못하는 전맹도 있다.

필자가 만난 어떤 시각장애인이 필요한 내용은 활동지원사가 노트북에 60pt로 써 주면 그 시각장애인이 한자 한자 읽기도 했다. 보통으로 쓰는 컴퓨터 글씨는 10pt이고 관공서 같은 곳에서는 12pt를 쓰는 것 같다.

요즘은 아들하고 같이 마트에 가서 아들이 좋아하는 것도 사고, 친구들이 오면 떡볶이 같은 것을 해 주기도 한단다.

“친구들을 자주 데려오는데 아들은 엄마 아빠가 시각장애인임을 친구들에게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검도를 하고 있는데 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검도장 친구들도 잘 데려오기 때문에 집에는 항상 빵이나 우유 과자나 과일 등 간식거리가 떨어지지는 않는단다.

현재는 시부모와 떨어져서 세 식구만 살고 있는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남편의 활동지원사가 와서 식사와 청소 등을 도와주고, 주말이면 활동지원사가 오지 않기 때문에 그가 직접 음식을 한단다.

“앞을 잘 보지 못해도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재료를 사서 직접 다듬고 요리를 해야 하므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요즘은 대부분의 재료들이 이미 다 준비된 즉석요리들이 많아서 하면 다 한다는 것이다.

“카레만 해도 라이트하우스에서는 하도 많이 먹어서 질렸는데 요즘은 주말이면 가끔 해 먹습니다.”

그러나 그와 남편은 시각장애인이고 시부모님은 연세가 높으셔서 아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부모와 정안인 자녀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캠프 같은 것이 있어서 부모와 자녀와 함께하는 친교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하! 필자도 그동안 여러 군데 나들이를 하면서도 그런 점은 놓친 것 같아 미안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참여하라고 할게요.

“우리 애가 어릴 때 언어 지원 프로그램으로 아이와 같이 유람선을 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들이 어찌나 좋아하든지…….”

몇 해 전 시부모와 그의 가족들이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단다.

“제주도 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시각장애인에게 차량을 빌려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보통 제주도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제주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리기도 하는데, 시각장애인 부부에게 렌터카는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제주 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기사가 있는 차량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2박 3일 동안 제주도 구경을 잘 했습니다."

한 번씩 아들과 나들이를 가면 아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래서 가끔 친구가 자기 엄마와 캠프를 가면서 아들도 데려간단다.

“우리 아들을 데려가는 친구 엄마도 고맙고, 스스럼없이 친구를 따라가는 우리 아들도 너무너무 대견스럽습니다.”

김영선 씨는 그의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카페가 조용하고, 점자 메뉴판도 있답니다.”

과연 ‘이디야 카페’에는 점자 메뉴판이 있었다. 김영선 씨는 점자 메뉴판을 보고 레몬티를 주문했고 필자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점자를 아는 시각장애인 손님이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겠지만 ‘이디야 카페’에 점자 메뉴판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시각장애인이 그리로 몰리지 않을까.

김영선 씨와 인터뷰가 끝날 무렵 시각장애인 동료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 동료도 점자 메뉴판에서 메뉴를 골랐다.

“점자 메뉴판이 있는 것은 좋은데, 음료나 베이커리 등 먹는 방법도 좀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도 있지만, 시각장애인은 볼 수가 없으므로 먹는 방법도 점자로 설명을 해 주면 좋겠단다.

김영선 씨는 곱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화장은 누가 시켜주는 것일까.

“아침이면 옷을 챙겨 입고 화장을 합니다.”

화장은 거울을 보고?

“아니요, 거울은 잘 보이지도 않지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기초화장을 하고 에어쿠션을 바르고, 립스틱을 바르면 끝입니다.”

거울도 없이 보이지도 않는데, 필자가 만났을 때 김영선 씨는 빨간색 립스틱을 곱게 바르고 있었다.

“아침이면 아들은 학교로 보내고, 물론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저는 남편과 같이 자비콜(바우처 택시)을 타고 가다가 저는 수영 로터리에서 내립니다.”

남편의 직장은 재송동이라 자비콜을 그냥 타고 가고 그는 직장이 센텀이라 수영 로터리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간단다. 필자가 김영선 씨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이었는데 지금은 휴직 중이란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특히 시각장애인은 자원봉사 등 사회로부터 많은 격려와 베풂을 받았기에 성인이 되면 그 베풂에 대한 보답도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도 작은 실천으로 안마사협회 대의원을 하고 있단다.

“안마사협회장 등 장애인단체장은 월급도 없는 봉사 직인데 그래도 서로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안마사협회에서 대원이 하는 일은?

“예산을 심의하고, 정관변경을 심의하는 등 일종의 협회 견제 기능입니다.”

현재 부산안마사협회 회원은 580여 명인데 그중에서 회비를 내는 정회원은 350명 정도란다.
안마사의 경우 회비 수납 방식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눈다고 했다. 1등급은 현재 안마업에 종사하는 사람, 2등급의 경우 종일 안마는 아니지만 파트 타임 안마사(경로당파견 안마사 등)이며, 3급은 안마사 자격증은 있으나 타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60세 이상과 기초수급자는 회비가 면제라고 했다.

“이제 곧 회장 선거가 있는데 투표권은 회비를 냈거나, 선거일 전 부산 거주를 확인한 면제자들에게만 있습니다.”

안마사협회 선거는 전국 동시 선거인데 점자와 묵자로 세 번 투표한단다. 제일 먼저 중앙 회장을 선출하고, 두 번째는 부산지부장, 그리고 대의원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투표용지는 점자와 묵자로 되어 있다. 봉사자가 시각장애인과 투표소 앞까지는 동행할 수는 있지만, 투표소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투표가 서툰 사람은 선거 관리인이 동행한단다.

“현재는 안마사가 시각장애인의 독점 직업인데, 여기저기서 계속 안티를 거는 사람들이 있어서 1년에 한 두 번은 서울로 데모를 하러 가기도 합니다.”

현재 대한안마사협회 부산지부 초선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느낀 생각은 "과거 선배들의 노력으로 발전한 안마사 제도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안마사들의 처우개선과 전문성 향상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했다.

안마업을 하는 현장에서도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말고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그리고 최선을 다해 대해야 한다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있단다.

“정말 안마사의 전문성 향상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낀 초선 대의원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대의원에 출마할 거란다.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안마사 밖에 없는데 그것도 장래가 불투명하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단다.

“우리 아들을 일반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교육에도 보다 더 힘 쓸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작으나마 사회에 기여하며 행복하고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김영선 씨 부디 아들 잘 키우고, 안마 열심히 하면서, 사회를 위한 공헌도 할 수 있기를.


#출처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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